2008년 2월 10일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어둠 속에서 네 시간여 만에 2층 누각이 붕괴하였고 한 시간 후에는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무너졌다. 전 과정이 TV를 통해 보도되면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 화재가 방화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은 더 큰 충격과 상실감을 가져다 주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숭례문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무너진 숭례문의 잔해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런 때에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복원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국보1호가 타버린 역사적인 사건의 상징성을 의식한 탓인지 충분한 여론의 의견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숭례문 주변으로 커다란 가림막을 세웠다. 이후로 가림막 겉에는 소실되기 전 숭례문의 모습이 프린트되어서 붙었다. 가림막 밖에서는 붕괴된 숭례문의 흔적을 볼 수가 없었고 사람들은 가림막 주변을 서성이다 돌아갔다. 화재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오직 가림막에 붙은 그날의 사진만 남아있었다. 사람이 다녀가면서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설치한 가림막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불에 타 흉물스럽게 남은 모습을 보기 싫어하고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을 의식해서 가리자고 했고 그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화재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눈으로 보고 슬픔을 나누고 반성하자는 쪽의 의견도 내어 놓았다. 결과적으로 가림막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에 남았는데 처음 세워질 때와 차이점은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작지만 투명한 창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이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에게서 벌어지는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려면 일정한 수준의 이성적인 행동이 요구된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약속 속에서 우리의 할 말을 다 못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내면에 억누르고 있던 모습들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 그것들이 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이들과 같지 않다는 불안감과, 남과 다름의 이질감 때문일 것이다.
유년의 추억, 아픈 사랑의 기억, 나를 화나고 분노하게 하는 것들, 남과 다른 자신을 알게 된 때의 순간들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외로움과 허무함 소외감은 사회가 발달할수록 더욱이 심해져만 가고 있다. 다른 이가 우리가 느끼는 이 감정들을 들어주고 이해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해소 해 주지 못한다. 그것은 각자의 고유한 것이고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속에 있는 이 다양한 감정과 욕구들을 억누르고 해결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은 자꾸 커지는 사회 속에서 더 크게 작용해서 우리를 더욱더 외롭고 힘들게 만든다. 숭례문 방화사건도 범인이 사회에 대한 감정을 연관성 없는 문화재에 방화한 것인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형태의 욕구 분출이라고 볼 수 있다. 억압된 것들은 몹시 성이 나서 우리에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해방은 반갑지 않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지금은 우리의 감정과 욕구들을 자연스럽게 해결해 줄 수 있는 해방구가 필요한 것이다.
더는 억누르고 가려서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만들지 말고 여전히 미미하지만, 숭례문 가림막에 낸 ‘작은 창’ 창처럼 우리들의 내면과 마음에도 작은 창을 내어보자. 그 시작이 미미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억압되었던 것들이 되돌아오면서 우리 삶과 삭막해져만 가는 사회를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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